강 길을 따라 구례 쪽으로 달리면서 섬진강의 넓은 모래톱과 대나무 숲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본다. 강이 산을 만나다 내달리고 또 산이 강과 다시 만나 어우러지는 섬진강과 지리산의 조화는 꽃이 피고 또 피는 봄에 더욱 빛난다. 비가 내리는 봄 길에 물먹은 벚나무들이 붉은 빛을 띠고 꽃봉오리를 키우고 있다. 아마도 3~4일 내에 꽃이 피기 시작할 것이고 3월 말에서 4월 초순에는 절정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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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곡사 들어가는 피아골 초입의 풍경 ⓒ 들찔레 |
강의 중간쯤에서 화개장터를 지나고 다시 서쪽으로 가다보면 구례군 토지면에 소재 한 연곡사로 들어가는 피아골 초입에 이르게 된다. 피아골의 봄은 강가에 비해 조금 늦게 온다. 드문드문 보이는 차밭을 제외하면 척박한 계단식 논은 아직 비에 젖은 흙의 무채색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동네마다 핀 매화나무가 곱고 흐르는 물소리가 맑다. 지금도 눈앞에는 좁은 산비탈을 억척스럽게 일궈 만든 수십 층의 계단 논이 보이고 이 깊은 지리산 속에까지 들어와 살아야 했던 고달픈 사람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건강함을 느끼게 해 준다.
처음 이곳을 들렀던 기억은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십 수 해 전, 학생시절 등산을 가던 길이었고 당시는 화전민들의 흔적처럼 산 높은 곳에 드문드문 초가집만 보였으며 마치 조선시대의 한 중간쯤에 와서 만나는 골짜기란 느낌이었다. 그런 곳이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원형이 사라져 가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지금은 더러 동네들이 들어섰으며 여러 곳에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남해 가천 다랑이 마을보다 못할 것이 없는 이곳을 보존하는 노력들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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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곡사 일주문 지나 대적광전 가는 길 ⓒ 들찔레 |
피아골 최고봉인 왕시루봉을 볼 수가 있는 연곡사, 빨치산의 중심무대 중 하나인 이곳에도 봄은 와서 인간에 대한 무서움에 길들여지지 않은 개구리들이 길가 고인 물에 알을 낳아 두었다. 생명이란 어쩌면 참 모진 것이어서 잎도 피기 전 어느새 겨울잠을 깬 동물들이 먼저 봄맞이를 하고 있다.
연곡사는 절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마치 어느 양반동네의 마당 넓은 큰집처럼 편안하다. 대적광전 못 미쳐 오른편에 있는 선암사의 그것과 닮은 해우소가 이 절집에서 가 장 돋보이는 건물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점이 피아골 오르는 동안 계단 논을 볼 수 있다는 것과 더불어 내가 이 절을 자주 찾게 된 이유의 하나이다. 마지막 이유는 국보 두 점, 보물 네 점이 있는 작은 절 집 연곡사엔 볼 것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여러 번 이절을 찾은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도탑을 볼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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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적광전 앞 위풍당당 산수유 ⓒ 들찔레 |
이 절의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아마도 골짜기에 단풍이 물드는 늦은 가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풍경을 본 적이 없다. 매 해 이른 봄에 다녀가서 아직은 겨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황량함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오늘 찾은 연곡사에는 봄이 무르익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절 입구부터 온 마당 가득히 매화와 수령이 오래된 산수유가 만발이다. 절에 온 것이 아니라 무릉도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뜻하지 않게 계절이 준 선물로 절로 발걸음 가벼워지고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사찰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고 한 것은 연기조사가 처음 이곳에 와서 지세를 보고 있을 때 현재의 법당 자리에 연못이 있었는데 가운데 부분에서 물이 소용돌이치더니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간 것을 보고 그 연못자리를 메우고 법당을 지으면서 붙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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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자나불이 내 뿜는 빛을 받은 듯 만개한 산수유 ⓒ 들찔레 |
연곡사는 지리산 주변 사찰 중 가장 먼저 자리 잡은 절로서 6.25의 빨치산과 토벌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부도의 대표 격으로 ´부도의 꽃´이라 불리는 동부도(국보 53호, 신라말기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와, 북부도(국보 54호, 고려 초기), 서부도(보물154호, 조선시대)가 있다. 그리고 몇 몇 예쁘고 아담한 부도를 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으며 그 외 삼층석탑(보물 제151호), 현각선사탑비(보물 제152호), 동부도비(보물 제153호)를 볼 수가 있다.
이 절의 중심 당우인 대적광전 앞마당에는 오래된 산수유나무 몇 그루가 멋스럽게 피어있다. 밑둥치부터 갈라져 쭉 뻗어 오른 가지는 10여 미터가 넘고 좌우로 도열한 같은 크기의 나무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귀한 멋을 보여준다. 마치 대적광전에 앉은 비로자나불이 그 광명을 세상에 전하려 발한 빛을 일시 산수유가 받아 빛나는 듯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절 뒤 산길에 있는 나의 최종목적지인 동부도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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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도 중의 하나, 동부도 ⓒ들찔레 |
´부도의 꽃´이라 불리는 동부도(국보 53호)는 그 비례미도 좋지만 마치 밀가루로 빚은 것처럼 정교한 조각이 일품으로 같은 전라도 땅에 있는 쌍봉사 철감선사부도탑과 더불어 아름답기로 따지면 우리나라 부도 중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것이다.
동부도의 기단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위받침돌을 올렸고 아래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또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 위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독특하다. 이런 가릉빈가는 불교적 장식으로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합천 영암사지 금당 계단의 소맷돌이나 동리산 태안사의 광자대사비의 이수를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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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도에 새져진 사천왕상 ⓒ들찔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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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도에 새져진 상륜부 ⓒ 들찔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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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도에 새져진 가릉빈가 ⓒ 들찔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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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도에 새져진 천인주악상 ⓒ 들찔레 |
몸돌은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 해 두었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 또한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위로 쌓아 놓았다. 동부도와 유사한 동부도비의 한 부분을 이루는 귀부는 등이 날개 모양을 하고 있어서 이채로운데 나말부터 고려시대에 조성된 귀부의 대부분은 험상궂고 무섭게 생긴 얼굴 모양을 하고 있다. 아래쪽에 있는 현각선사탑비 역시 고려시대의 것으로 동부도비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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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부도비의 귀부와 이수 ⓒ 들찔레 |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북부도는 조성 양식이 동부도와 거의 같으며 이는 조선시대에 만든 서부도도 마찬가지다. 다만 부도에 새겨진 조각의 기법이 갈수록 많이 떨어져 서부도가 북부도에 못 미치고 북부도가 동부도와 견줄 수 없다. 서부도 뒤에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만들어진 종형부도와 간소한 모양의 팔각원당형 부도가 모두 세 기 있는데 그 중 작은 머릿돌을 이마에 얹은 팔각원당형부도 하나는 균형미와 더불어 앙증맞은 귀여움이 있어 개인적으로는 가장 예쁜 부도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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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부도 ⓒ 들찔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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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도 ⓒ 들찔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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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간소하지만 예쁜 부도들 I ⓒ들찔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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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간소하지만 예쁜 부도들 II ⓒ 들찔레 |
절 뒤 부도들을 보고 돌아 내려오는 산길은 비에 젖어 촉촉이 젖어있고 푸른 조릿대가 빗물을 몸으로 받으며 토독거리는 소리를 낸다. 봄에 비에 젖은 낙엽 위를 걸으며 땅으로부터 전해오는 부드러운 느낌이 참 좋다. 더구나 멀리 숲 바깥에서 전해오는 바람 한 줄기가 봄냄새를 그대로 전해준다. 지리산 피아골에도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절 마당에 가까운 서부도 가까이에 오래된 동백나무 서너 그루 붉은 꽃을 매달고 싱싱하다. 떨어진 동백꽃이 비에 젖어 더 붉고 잠시 들른 과객은 봄기운에 흥건히 마음이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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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곡사 삼층석탑 ⓒ 들찔레 |
연곡사 삼층석탑은 절 중심의 오른편 아래쪽, 서부도의 왼쪽 아래에 있다. 법당과 떨어져 늘 홀로 덩그러니 서있는 것이 애처로웠는데 오늘은 탑 주위에 활짝 핀 산수유나 매화나무에 둘러싸여 탑 얼굴이 여린 신부의 얼굴처럼 곱고 곱다. 연곡사 삼층석탑은 특이하게 기단이 삼층으로 만들어 졌는데 이층 기단까지는 신라탑의 형식을, 넓이에 비해 과장되게 높은 셋째 기단은 전형적인 3층의 백제 탑 형식을 하고 있는 혼합양식을 보인다. 몸돌도 넓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이가 높아 산지 절에 놓이는 탑의 형식 혹은 백제탑의 양식을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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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곡사 종루 앞 풍경 ⓒ들찔레 |
석탑을 지나 대적광전 아랫마당 종루 앞이 봄의 풍경 중 가장 압권이다. 절 입구부터 이곳까지 돌계단 양 옆으로 피어난 매화의 군무, 종루를 지키는 늠름한 권속 같은 산수유, 괘불대 옆에 가지를 활짝 편 또 다른 매화, 그리고 앞, 옆, 뒤에 둘러 산 지리산의 조망은 다시 한번 봄기운을 내 온 몸에 적시는 기회를 준다.
잠시 몸을 데우려 새로 생긴 절의 찻집에 들른다. 탁자위에 놓인 작은 꽃병에 작은 매화가지에 핀 흰색의 꽃이 애처롭다. 그 곁에 놓인 몇 송이 동백꽃 또한 서럽다. 제 머무를 곳에 있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의해 옮겨진 꽃의 운명이 그렇게 느껴졌다. 토닥거리며 내리는 봄비를 창을 통해 완상한다. 비 맞아 더 푸른 소나무의 실루엣이 밝고 싱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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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곡사 앞마당엔 봄비 내리고 소나무 숲 맑다 ⓒ 들찔레 |
다시 길을 잡아 섬진강 물줄기로 내려오는 시간, 왕시루봉 있는 계곡을 자꾸 뒤돌아보는데 아래로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그냥 가란다. 언제고 또 오면 될 것을 아쉬워 말라며 그 때는 그때대로 지리산의 고운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 타이른다. 멀리 산 위로 시루떡 쌓아 놓은 듯 층층이 높은 층계논 사이로 실핏줄 같은 길이 돌아 오른다. 저 산 깊숙한 곳에 봄이 닿을 날도 머지않았을 것이다. 가을 단풍들 때쯤 다시 찾아와 조락의 의미도 배워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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